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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팀이 지길 바라는 영국인들이 있다니

by 영국품절녀 2026. 7. 17.

안녕하세요. 오늘 새벽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4강 경기가 있었지요. 경기 전부터 정말 말들이 많았는데요, 저 역시 잉글랜드를 응원은 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이길 것 같은 예감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SNS에서는 울고 있는 영국인들의 모습, 아르헨티나 팬들의 승리를 만끽하는 모습 등을 보다가 제 손이 멈췄어요.

 

(BBCnews @copyright)

BBC가 영국 길거리에서 월드컵 준결승 인터뷰를 하는 영상이었는데요. 금발을 길게 땋은 젊은 여성이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I hope Argentina wins."

아르헨티나가 이기면 좋겠다고요. 잉글랜드가 아니라요??

여기가 어디냐고요? 영국입니다. ㅎㅎ

그리고 씩 웃으며 덧붙이더라고요. "Because I'm Scottish."

아, 그래서였구나 싶었지요.

 

(인스타그램 임베드: BBC News @bbcnews)

 

영국인인데 잉글랜드를 응원하지 않는다고?

한국에서는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요. 우리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갔는데 "일본 이겨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게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Anyone But England'라는 말이 아예 있거든요. 직역하면 "잉글랜드만 아니면 누구든".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월드컵 시즌마다 반쯤 농담, 반쯤 진담으로 하는 말이에요.

테니스 스타 앤디 머레이도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2006년 월드컵 때 "잉글랜드만 빼고 아무나 응원한다"고 농담했다가 잉글랜드 언론에 한참 시달렸어요. 그 후로도 이 얘기는 두고두고 따라다녔고요.

 

영국은 한 나라가 아니거든요

제가 캔터베리에 살았을 당시, 제가 다니던 영국인 교회에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꽤 많았어요. 그분들은 항상 브리티시가 아닌 스코티시라고 소개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상황들이 왜 일어나는지 알려 드려 볼게요~

영국(United Kingdom)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네 나라가 합쳐진 연합왕국이에요. 그런데 축구에서는 네 팀이 각자 대표팀으로 나와요. 올림픽에서는 한 팀(Team GB: Great Britain)인데, 월드컵에서는 넷으로 갈라지는 거죠.

그러니 스코틀랜드 사람에게 잉글랜드 대표팀은 '우리 팀'이 아니라, 수백 년 라이벌인 '옆 나라 팀'인 거예요.

 

스코틀랜드의 짝사랑 같은 월드컵

이번 월드컵이 스코틀랜드에게는 특별했어요. 무려 28년 만에 본선에 진출했거든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처음이었어요.

지난해 11월 덴마크와의 최종전에서 맥토미니가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오버헤드킥을 터뜨리고, 추가시간에만 두 골이 더 들어가면서 4-2로 이겼을 때, 스코틀랜드 전체가 울었다고 해요. 특히 저는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타탄 아미(Tartan Army)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그런데 본선에서는요. 아이티를 1-0으로 이기고, 모로코와 브라질에 져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어요. 28년을 기다렸는데 3경기 만에 끝난 거예요. 저 역시 스코틀랜드가 졌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ㅠㅠ

그리고 그 옆에서, 잉글랜드는 승승장구하며 4강까지 올라갔어요. 우승까지 딱 두 경기 남겨두고요. 잉글랜드가 우승하면 1966년 이후 60년 만이었어요.

스코틀랜드 사람들 심정이 어떨지, 조금은 상상이 가시죠? ㅎㅎ

그래서 오늘 새벽, 그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한국시간 7월 16일 어제 새벽,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를 2-1로 꺾었어요.

잉글랜드가 후반에 먼저 한 골을 넣고 앞서갔거든요. 아, 이번엔 정말 결승 가나 보다 했는데. 경기 끝나기 5분 전에 동점골이 터지더니, 추가시간에 결승골까지 들어갔어요. 두 골 모두 메시의 발끝에서 시작됐고요. 서른아홉의 메시가 잉글랜드의 60년 꿈을 7분 만에 무너뜨린 거예요.

릴스 속 그 스코틀랜드 여성의 소원은, 이렇게 잔인할 만큼 극적으로 이루어졌어요.

"Gutted." 한 단어에 담긴 표정

경기가 끝나고 BBC Sport가 올린 또 다른 릴스를 봤어요. 경기장 앞에서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은 중년 부부가 인터뷰를 하는데, 화면에 딱 한 단어가 떠요.

"GUTTED."

직역하면 '내장이 뽑힌'. 영국 사람들이 진짜 참담할 때 쓰는 표현이에요. 실망했다(disappointed) 정도로는 부족할 때,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을 때 쓰는 말이거든요. 그 아주머니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 단어 그 자체더라고요.

지금 떠올려보니, 저는 영국에서 2006년과 2010년 월드컵을 봤어요. 기억나는 것이 펍에서 한국 vs 스위스 전을 유럽 친구들과 함께 봤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가 스위스에 졌는데요, 스위스 친구가 계속 깐죽거리는 거예요. 이에 열 받은 한국인 친구가 결국 몸싸움까지 벌여서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저와 한국인 친구들의 심정이 바로 "gutted"였습니다.

 

미워하면서도 한 지붕

재미있는 건, 'Anyone But England'가 진짜 증오라기보다는 형제 싸움에 가깝다는 거예요. 동생이 잘되는 건 배 아픈데, 남이 동생 욕하면 발끈하는 그런 사이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872년 세계 최초의 축구 국가대표 경기를 치른 사이예요. 150년 넘게 투닥거려온 거죠.

오늘 밤 잉글랜드의 펍에서는 맥주잔 위로 한숨이 쏟아지고, 스코틀랜드의 펍 어딘가에서는 남몰래 축배가 오갔을 거예요. 같은 섬, 같은 나라 안에서요.

"I hope Argentina wins"라던 그 웃음과 "Gutted"라던 그 표정 사이의 거리. 그게 제가 7년 동안 살면서 느낀, 영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영국다운 모습이에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었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