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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품절녀 & 남 in UK/영국 품절남 글은 여기에

월드컵에 한숨 쉬는 나에게 벨기에 친구의 위로

by 영국품절녀 2014. 6. 26.

안녕하세요? 영국품절남입니다. 한국에 들어오니 더욱 바쁘네요. 개인적인 일뿐만 아니라 집안에 큰일까지 치러야 했기에 더욱 귀국 후 정신 없이 보냈던 한 달이었습니다. 영국과 비교해 보면 날씨까지 후덥지근해서 더욱 힘들게만 느껴졌던 것 같네요.

 


어제 저는 서울 한복판에서 벨기에에서 온 친구와 재회했습니다. 저의 4년 동안의 박사과정 기간 동안, 저와 이 친구는 고작 반년 정도밖에 함께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보다 학위과정을 훨씬 일찍 시작하기도 했거니와 학위가 채 마치기 전에 현실 정치에 투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친구가 아닐까 합니다. 학위 과정 중 처음 사귄 친구이기도 했지만, 짧은 기간임에도 저에게 보여준 관심과 배려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던 저를 항상 옆에 불러다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그 내용은 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이었지요. 이미 박사과정 3년차였던 그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 논문 작성법과 1년차 때에 해야 할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연구 방법론과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나마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친구의 도움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저도 이 친구를 부를 때 이름보다도 "사부"라는 말로 높여 주었지요.


서울 시내 호텔 로비에서 만나 인사를 간단히 나눈 후 그의 첫 마디는 "진심으로 축하한다" 였습니다. 자신이 신경 써준 사람이 무사히 학위를 마친 것이 기뻤나 봅니다. 물론 그 친구도 금년에 뒤늦게 학위를 받은 터라 저도 축하한다고 해 주었지요.

 

 

벨기에 친구가 준 브뤼셀에서 사온 다크 초콜릿

 


삼청동에서 팥빙수를 같이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공통주제는 단연 박사과정 중 있었던 에피소드였습니다. 특히 학교의 교수들에 관한 이야기와 최종 구술시험 중 겪었던 경험들을 서로 나누며 웃기도 하고 울분(?)을 표출하기도 했지요. 심사위원들의 배려로 비교적 편하게 최종구술시험을 치렀던 저와는 달리, 그 친구는 그 때에 꽤 고생한 것 같았습니다. 외부도 아닌 내부 심사위원이 이런저런 태클을 걸어와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군요. 학과 내에서도 유명한 교수였는데 과연 그 명성이 헛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터라 대화의 주제는 곧 "월드컵 축구" 로 넘어갔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에 온 뒤 빡빡한 일정 때문에 밤만 되면 쓰러져 자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축구는 꼬박꼬박 챙겨봤더군요. 특히 벨기에-러시아전은 신촌의 음식점까지 가서 시청했다고 합니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 한국 vs 벨기에 –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 친구는 대뜸..

"너네는 꼭 이겨야 할거야."

제가 웃으면서 한숨을 쉬자, "Hey, 결과는 모르는 거야"

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더군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얼굴에는 '우리(벨기에)가 설마 한국에게 지겠어?' 라고 써 있더군요. 웃으면서 말하는 그 표정을 보니 한 대 살짝 쥐어박고 싶은 마음도 들긴 했지만, 이번 대회 기간 중 한국팀이 보여준 경기력이 딱 그 정도이니 할 말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 말처럼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개인적인 생각은 이번 기회에 망신을 한번 톡톡히 당해야 한국 축구도 정신차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축구 이야기를 더 할 것도 없어져서 저도 슬쩍 다른 쪽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흘렸습니다.


반나절이라는 시간은 그 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에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수다쟁이들처럼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대화가 끊기지 않았지요. 축구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조별 경기, 승패를 떠나 납득할 수 있는 경기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