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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학위(석사, 박사)

한국 대학과는 차원이 다른 영국 대학 레포트 문제에 당황

by 영국품절녀 2012. 1. 27.



영국에서 와서 에세이(Essay)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수필"의 의미로만 다가왔었어요. 우리는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 준 대로, 수필이란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로만 이해했었지요. 그런데 막상 영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장애물은 막상 영어가 아닌 에세이였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에세이란 우리가 배웠던 수필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이 아니었죠.


영미 대학에서의 에세이는 - 물론 여러가지 정의가 있기는 합니다만 - "Long, systemic discourse,"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즉 "길고 체계적인 담론(글)"로 번역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러다 보니 대학 시절부터 비판적인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한국 학생들은 - 중국, 일본 마찬가지 - 에세이라는 것을 접하고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취직 공부 등을 위해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하는 일부 한국 대학의 학생들은 해피 캠퍼스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 받아 그대로 혹은 살짝 바꿔 제출하곤 하지요.  아마 대입을 위한 논술 공부가 그나마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울 신랑이 저번 학기부터 정치학과 학부 1학년과 2학년을 상대로 수업을 나갔어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레포트 문제가 황당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몇 문제 정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학년 전공 필수인 "Introduction to Government"의 문제 입니다.

질문: 혁명과 정치적인 폭력의 구조적인 해석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가? 
 (To what extent are structural explanations of revolutions and political violence convincing?)

2학년 선택 과목인 "East Asian Political System"의 문제입니다. 이 과목은 한국과 북한도 다루었기 때문에 관련 문제도 있었어요.
 
질문: 한국의 세 명의 대통령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을 비교 및 대조하여라.
       특히 그들의 주요정책의 차이점과 같은점에 초점을 맞추어라.

(Compare and contrast the three South Korean Presidents, Kim Dae-jung, Roh Moo-hyun and Lee Myung-bak. Focus in particular on their major policy differences and similarities.)

그럼 또 다른 문제.
질문: "핵무기가 가지는 억제 효과 때문에, 북한의 핵 보유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를 한다." 이 견해에 대해 논하라.
('Due to the deterrent effect of nuclear weapons, North Korea’s nuclearisation is conducive to maintaining peace and stability in East Asia.’ Discuss.)


                
          에세이를 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읽을거리를 소화해야하는 영국 대학생들 (출처: 구글 이미지)

2학년의 문제는 우리에게는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동아시아 정치에 무지한 영국 및 유럽 학생들이 대다수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쉬운 문제라고 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1학년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만만치가 않습니다. 특히 1학년 전공 필수 과목의 에세이 질문들은 문제부터 이해하기 만만치 않아, 교수 혹은 강사들에게 문제 설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하네요.
(영국 대학생들도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나 봅니다.)



영국 에세이에 또 다른 어려운 점은 글을 쓸 때, 엄격하게 출처를 인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대학은 특히 1학년 때부터 정확한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양의 책과 논문을 읽도록 유도하기 위해 각 과목 커리큘럼에 그 리스트를 소개해 줍니다. 즉 어떠한 식으로 답변을 하든지, 커리큘럼에 소개된 Reading List를 보면 대체로 작성할 수 있게끔 해 놓습니다. 따라서 소개된 책, 논문 등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글을 쓰기 조차 힘들지요.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학생의 에세이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훌륭하고 그 근거 또한 탄탄하다면 비록 채점자와는 견해를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입니다. 영국 대학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은 교수가 수업 시간에 가르쳐준대로 답을 썼다가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요. 그 이유는 너의 생각은 없는 거냐? 왜 내가 알려준 대로만 답을 썼냐고 했다네요. (물론, 교수마다 차이는 있겠지요.)

한국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강의하는 교수의 의견대로 답변을 작성하는 것이 보다 높은 점수 받기에 유리한 면이 있죠. 중국에서 유학했던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대학에서는 교수의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썼다가는 아예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이에 비해 영국은 학생의 글 속에서 논리성, 비판적 사고, 충분한 인용을 통해 그 글의 설득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OECD국가 중에서 최고로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진학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대학에서 받는 교육의 질이 아닐까요? 영국 대학의 경쟁력, 더 나아가 국가 경쟁력은 바로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순히 "~~에 대하여 논하라," 혹은 "~~에 설명해라" 와 같은 레포트 주제도 문제이지만, 매년 거의 똑같은 레포트 주제가 나오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요? 한국 대학의 미래가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