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국품절녀 & 남 in UK/영국 품절남 글은 여기에

꽉 막힌 세면대와 닮은 정도전의 고려와 현재

by 영국품절녀 2014. 4. 7.

안녕하세요? 품절남입니다. 주말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어제 저녁에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며칠 전에 청소를 했었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몇 달 전부터 세면대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생각난 김에 손 좀 보려고 했지요.

 

우선 인터넷을 통해 막힌 세면대를 청소하는 방법에 대해 찾아 보았습니다. 세면대 구멍에 베이킹소다를 넣고 식초를 부은 후, 거품이 나면 어느 정도 있다가 뜨거운 물을 부어주라고 하더군요. 지금까지는 근처에서 세면대 뚫는 약품을 사서 처리했는데 일요일 오후 5시만 되면 모든 슈퍼나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면대가 뚫리기는커녕 물이 역류하고 아예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품절녀님은 옆에서 괜히 일만 만들고 세면도 못쓰게 되었다고 투덜거렸지요.

 

 

당황한 저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바로 세탁소 옷걸이를 곧게 펴서 막힌 구멍을 뚫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막혀 있던 물이 어느 정도 내려가긴 했는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방법은 세면대 아래에 있는 하수관을 뜯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품절녀님께 미리 말하면 못하게 말릴 것이 분명하니 저는 조용히 화장실 문을 닫고 세면대 아래의 관을 분해하기 시작했네요.

 

으아~ 조심스럽게 뜯어본 플라스틱 관에는 엄청난 양의 머리카락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웬만한 화학약품을 부어서는 녹이기도 힘든 머리카락입니다. 곧게 편 세탁소 옷걸이로 구석구석을 긁어내자 쏟아져 나온 만큼의 머리카락이 더 나옵니다. 품절녀님께 한 번 와서 보겠냐고 물으니 정색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입덧이 심한데 이런 혐오스러운 장면을 보면 큰일나겠지요. ㅎㅎ 청소 후 관을 다시 조립하고 물을 틀어 보았습니다. 잘 뚫린 관에서 물이 막힘 없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니 제 마음도 시원해졌습니다.

 


영국 화장실의 바닥은 건조하기 때문에 청소할 때도 주의해야 했지요. 세면대 청소를 마치자 문득 요즘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 정도전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습니다. 권문세족의 무차별적인 토지점유와 홍건적 및 왜구의 침입은 전 국토를 황폐화시킨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지요. 막혀 있던 이 세면대가 묘하게 당시 고려의 시대와 오버랩되었습니다.

 

재작년 여름 이 집에 이사온 이래, 세면대가 막힐 때마다 제가 취한 방법은 화학약품이었습니다. 저녁에 자기 전에 부어주고 다음날 아침이면 세면대가 뚫려 있었지요. 하지만 그 동안에도 세면대 관에는 머리카락이 녹지 않고 조금씩 쌓여갔던 것입니다. 결국 화학약품이나 민간 요법으로도 도저히 해결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미 그 당시 고려는 저희 집 세면대처럼 꽉 막혀서 제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최영과 정몽주와 같은 충신들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제가 그 동안 사용했던 화학약품처럼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했지요. 제가 하수관을 분해해서 머리카락을 전부 긁어냈던 것과 같이 고려도 처음부터 끝까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나라였습니다.

 

 

물론 위화도 회군으로 비롯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영이나 정몽주로 대표되는 고려의 충신들을 과소평가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제 에피소드에서 정도전이 그의 친우인 정몽주에게 한 말은 고려라는 국가를 짧지만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고려가 언제는 사람 사는 세상이었던가?”

 

드라마의 주인공 정도전이 가진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꿈꿔왔던 세상은 단순히 사람이 제대로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체제내의 개혁을 거부하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겠지요. 최영이 퇴장한 고려 조정은 다시 위화도 회군의 두 주역 이성계와 조민수의 갈등으로 파란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舊왕조의 충신 정몽주의 이상과 신세계를 꿈꾸는 정도전의 현실인식이 충돌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및 정치와 맞물려 많은 것을 생각나게끔 하는 한 편의 명작드라마를 보는 듯해서 다음 주말이 기다려집니다.

 

                 글쓴이에게 추천 버튼 꾸욱~ 눌러 주세요.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