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영화 빈집을 보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2004년에 개봉된 영화 빈집은 여느 김기덕 감독의 작품답게 보고 난 후 여운이 진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촬영 장소가 된 아름다운 한옥을 기억하실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어요. 오늘의 주인공인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씨가 사는 곳이 바로 그 아름다운 한옥입니다.
데이비드 킬번씨는 한국인 부인과 함께 북촌 한옥 마을에서 25년째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한국에 오신 뒤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 부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었지요. 그런데 영화 빈집이 개봉하던 그 해 2004년, 서울특별시 (시장님이 누구?) 가 북촌 한옥 가꾸기 사업을 개시했는데, "한옥 개보수"에 수천만을 지원해 주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북촌 마을을 휩쓴 재개발 광풍은 뜻하지 않게 킬번씨 부부를 고단한 투쟁의 길로 내 몰았습니다.
문제는 이 프로젝트가 시행되자 마자, 개발투기로 투기목적 자금이 몰려와 원 거주자들은 떠나고 새 거주자들이 대거 몰려 들었고, 이들은 개보수가 아니 재건축 (특히 상업적 이용)을 목적으로 전통가옥을 무참히 훼손시켰습니다. 킬번씨는 포크레인이 한옥마을을 뒤엎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 일을 외부 언론에 알리고자 동영상을 촬영하는 등 본격적으로 한옥 마을 지킴이로서 앞장 섰다고 합니다. 킬번씨 부부의 지리한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촌 한옥 마을의 재개발의 문제점은 투기꾼들이 그 일대를 대거 사들인 후, 지붕만 번지르르하게 기와를 씌운 뒤, "요정, 공연장, 고급 숙박시설" 등으로 둔갑시켜 고위층 인사를 대상으로 하는 용도로 개조되어서 재개장을 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행히 그 동안 킬번씨 부부의 노력과 일부 언론의 보도로 섣불리 개장을 못하고 있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재벌들이 북촌 한옥들을 사들여 아예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한옥 마을의 원형이 일부 훼손되었으며, 아직 개보수(실질적 재개발)가 이루어지지 않아 빈집들만 넘쳐나게 된 것이죠. 따라서 가회동 킬번씨 집 근처는 낮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긴 하지만 밤만 되면 사람이 살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돼버린 지도 꽤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제목처럼 진짜 빈집들만 이 동네에 남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것 같아요.
종로구 북촌 일대 재벌가 지도
(출처 시사저널: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422)
이 기사를 보시면 재벌가들이 북촌일대를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킬번씨 부부는 이 집을 떠나면 이 집마저 파괴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산이 탕진되더라도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새 이웃들(대다수 투기꾼)은 이분들이 지쳐서 제 발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 각종 어의 없는 소송을 걸고 있답니다. 우스운 것은 이 사람들이 내는 소송 중의 하나가 건축법 위반이라는 것인데, 그냥 자기집에 산 사람들이 무슨 건축법을 위반한 것인지 황당할 따름입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일은 킬번씨는 한옥 지킴이로써 앞장서 나서다가 사고까지 당하셨다고 합니다. 2006년, 공사현장 직원과의 몸싸움 중에 일어난 사고로 시력을 거의 잃을 뻔 했답니다. 한국인 부인도 몸에서 암이 발견되어 이들 부부의 투쟁이 더욱 힘들었답니다.
다행히 현재 이분들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한국인들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합니다. 문화예술에 소양이 깊은 킬번씨 부부는 2010년부터 자신의 가옥을 활용하여 공연 등 무료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이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조용히 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오는 4월 21일(토) 저녁 7시에 킬번씨의 가옥(종로구 가회동 31-71)에서 음악 공연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공연은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울러졌으며, 무대와 객석이라는 아예 없고 연주자와 관객이 서로 호흡할 수 있는 공연이라고 하네요. 저는 영국에 있는 관계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저를 대신해서 많은 분들이 꼭 한옥 지키기 공연에 참석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NOKHA 공연: 4월 21일(토) 7시 장소:종로구 가회동 31-79
제가 영국에 살면서 감동 받은 것 중 하나가 "문화와 전통을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수하는 영국인들의 삶의 태도"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만 해도 빅토리아 시대에 지은 서민주택으로 거의 200년이 되어 간다고 하네요. 그에 비하면 한국, 한국인은 어떤까요? 한국문화의 보존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한국인도 아닌 영국인이라는 사실에 부끄럽지 않나요? 우리 한국 사람들 정말 반성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킬번씨의 홈페이지는 http://www.kahoidong.com/ 입니다.
"한옥 마을 살리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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