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품절남입니다.
품절녀님은 제가 노는 꼴을 못 보는 모양입니다. 논문 제출하고 집에서 좀 빈둥거렸더니 글을 쓰라고 사람 못 살게 구네요. 사실 몇 달 동안 논문만 생각했던 터라 어떤 내용을 포스팅해야 할 지 난감합니다.
어제 지도교수를 만나 조금 늦은 점심식사를 한 후, 집에 오니 BBC에서 소치 동계 올림픽을 중계해 주더군요. 품절녀님이 대청소 중이시라 틀어놓기만 하고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제가 동계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런지 관심은 덜 하네요.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전 스케이트와 스키를 못 탄답니다. 스노우 보드는 말할 것도 없지요. 운동 신경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김연아 선수 덕분에 피겨 스케이트는 몇 번 보긴 했습니다만 잘 모릅니다.
지난 주부터 인터넷을 보니 동계 올림픽 관련 뉴스들이 꽤 나오고 있던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이슈는 역시 안현수 선수가 아닐까 아닙니다. 러시아로의 국적 변경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한국 언론에서 큰 화제가 될 줄은 몰랐네요. 정작 현재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를 정도로, 유독 안현수 선수에게만 조명이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국내 포탈 사이트에는 안현수 기사가 시시각각 올라오고 있습니다.
(출처: 다음 기사 검색)
안현수 여자친구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며,
국적이 러시아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게다가 안현수 선수 관련 뉴스의 댓글에는 국적 변경을 비난하기보다는 응원하는 분위기가 많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물론 그 배경을 저도 어느 정도 뉴스나 관련 TV 프로그램을 통해 접했기 때문에 모르지는 않습니다. 일부 한국 스포츠 종목의 뿌리 깊은 파벌 싸움 – 비단 이 분야만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 에 대한 반발 심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듯 보이네요. 한국 언론조차 관심이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보다 안현수 선수에게 있다는 점은 그 만큼 이 문제가 가볍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출처: 다음 뉴스)
제가 논문을 쓰면서 잠깐 읽어 본 논문과 책 중에는 "스포츠와 민족주의" 에 관련한 글들이 몇 편 있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자국 선수들의 운동 경기에서의 선전을 지켜 보면서 국민들은 선수들의 승리를 자신과 국가의 승리로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운동 선수들임에도, 오직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그들의 인생을 드라마화하곤 하지요. IMF사태로 한국 경제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을 때, 국민들을 위로해 준 사람도 다름아닌 박찬호 선수와 박세리 선수였지요. 또한 김동성 선수가 솔트레이크 올림픽에서 이른바 "오노 액션" 으로 인해 금메달을 박탈당했을 때에도, 전국민은 분노했고 그 화살은 오노선수의 모국이자 올림픽 개최국이었던 미국에게 쏠렸었지요.
이랬던 한국에서 국적을 바꾸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前 한국 국적의) 러시아 선수를 응원하는 초유(?)의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부분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출처: 연합뉴스)
1.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파벌주의와 상대적 박탈감
전 세계 어느 사회나 조직에 가더라도 학연 및 지연 등으로 얽힌 파벌 – 그에 따른 청탁 – 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운동 경기처럼 "능력"만이 선수 선발에 가장 큰 요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부분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이는 두 말할 것 없이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안현수 선수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과도한 관심은 훌륭한 선수가 국적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관련 단체에 대한 분노이자, 나아가서는 이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차라리 안현수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관련 단체의 부정부패가 – 그런 문제가 존재하느냐의 논의는 뒤로하더라도 –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댓글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출처: 다음 검색)
2. 한국인의 약해진 혈연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우선 한국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외국 국적인 한인도 한국인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요? 사실 대중뿐 아니라 언론들도 "Korean"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한국인 혹은 한국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양한 이유로 한국에 와서 한국 국적을 딴 사람들과 한국계이지만 외국 국적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국제결혼과 이민이 보편화된 21세기에는 한국인을 규정하는 것이 예전보다 더욱 복잡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최근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민족 의식보다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공유해야 할 시민(Civic)의식 – 이를 테면 헌법이 보장한 자유 민주제를 수용하고 그 의무를 다하는 – 이 더 강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해 보입니다. 쉽게 설명해 보자면, 1990년대까지는 중국 동포들을 한민족 테두리 속에서 인식해 왔었으나, 이제는 한국어를 하는 중국인으로 보는 경향이 뚜렷하지요.
(출처: 연합뉴스)
만약 10년 전에 이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요?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조국을 배반한 선수라고 대중이나 언론들로부터 낙인 찍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로 추성훈 선수가 이 케이스에 해당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2년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추성훈 선수가 일장기가 달린 유도복을 입고 금메달을 땄을 때, 스포츠 신문 제목이 "조국을 메쳤다" 였다고 하더군요. 만에 하나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안현수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면, 우리 언론에서는 어떤 기사 제목이 등장할 지 궁금해지네요.
(출처: BBC)
BBC 기사에서는1,500m 남자 쇼트 트랙의 전망을 이렇게 합니다.
"한국과 캐나다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예상되지만,
"빅토르 안을 주목해야 한다"
과연 지난 10년 동안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바뀌게 했을까요? 이제 한국인들도 예전처럼 무턱대고 한국 선수들의 선전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 결과를 내기 위한 공정한 과정 (fair play) 역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아울러 국적 변경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의 자유로운 – 안 선수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 선택으로 인정해 주네요. 앞서 말했듯이 저는 지금까지 동계 올림픽의 열렬한 팬은 아니었지만, 오늘부터는 여러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동계 스포츠 자체의 매력을 느껴 보려고 합니다. 아~ 저는 당연히 우리나라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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