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품절남입니다.
TV만 켜면 메르스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한 지난 주,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한인 여학생의 소식이 크게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에서 동시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이 여학생을 잡기 위해 이 두 대학들은 각각 2년씩 다닐 수 있는 특전을 제공했다는 소식이었지요. 우리 언론에서는 학생 당사자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등 자랑스러운 소식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한국 언론은 국위(?)를 선양한 이 학생을 칭찬과 격려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결국 모든 것이 이 여학생의 거짓말로 드러났고 이를 보도한 언론은 사과하기에 바빴지요.
문제는 이 소식이 처음 알려졌을 때부터 이들 부녀의 말만 믿고 받아 적기에 급급했던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취재과정에서 이 학생이 합격했다고 한 학과의 교수는 오히려 기자에게 "왜 기사화하기 전에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나?" 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최초 보도한 기자나, 그 기사를 퍼 나르기에 바빴던 한국 언론이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인 듯 합니다.
(출처: youtube)
그런데 제가 우리 언론에게 실망한 부분은 "거짓말임이 알려진 후의 보도 자세" 였습니다. 물론 일부 언론의 문제입니다만, 한 언론은 온 종일 이 문제로 '하버드나 스탠포드와 같은 명문대에서 장차 한국인 입학생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지 않을까',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지나친 교육열이나 학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것에 온통 신경을 썼습니다.
저는 '언론에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꽤 오래 전 뉴스입니다. 한인 대학생 한 명이 총을 들고 강의실에 난입해 교수 및 급우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전 세계를 경악시킨 사건으로, 저는 그 때 마침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 곳 신문에조차도 가해자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실렸었죠. 이 때 한인사회와 미국대사에게까지 사과를 했지요. 이 사건이 한미양국의 정치문제로 붉어지지 않을까 외교통상부는 긴장까지 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이 있다는 주장까지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두 사건의 경중과 본질은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부 언론 – 과 대중의 대응은 비슷하더군요. 한 명의 한국인이 죄를 지었으니, 이 문제로 현지의 한인사회,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 악화로 되돌아올 피해를 걱정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인사회와 정부차원에서 사과를 표해야 한다고요.
2001년 9월 11일, 중동 출신 테러리스트들이 민간 항공기를 탈취하여 뉴욕 쌍둥이 빌딩과 충돌하여 무수히 많은 미국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미국의 무슬림 사회는 이 사건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로 인한 사과조차 없었지요. 일반 미국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시선이 냉랭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공식적인" 제재나 차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출처:Google Image)
대학에서의 참극이 벌어졌던 2007년, 미국 언론은 한국인 및 한국 정부의 대응에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탈이 한미관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걱정하며 요란법석을 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민족과 개인" 을 동일시하는 강한 민족주의 감정에 대한 나름대로 분석도 했지요. 미국은 본질적으로 이 사건을 한 개인이 저지른 끔찍한 참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정부, 미국언론,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국적, 인종 보다는 한 개인의 문제로 보았던 것이지요. 물론 저 개인적으로 미국에 인종적 편견이 없다고 말은 못하겠습니다.
저는 민족과 개인의 동일시하는 우리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 이외에 또 다른 "사대주의 정체성"을 꼽고 싶습니다. 지난 봄 미국 대사가 피습을 당했을 때, 미 대사관 앞에서 일부 단체의 모습은 우리의 사대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짚어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사 쾌유를 비는 마음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공개적으로 기도회 열고 부채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미국정부의 대리자인 미국대사에 대한 피습은 분명 정치적으로 큰 사건입니다. 당연히 사건의 수습과 처리는 공정하고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정부차원에서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과연 일반 국민들까지 미국 대사관 앞에서 "석고대죄" 까지 해야 했을까요?
"개인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동일시 하는 이런 한국인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역시 시대의 산물이니까요. 또한 비폭력적이고 포용적인, 그리고 열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사대주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우리 속에 있는 찌꺼기 입니다. 우리의 힘이 약하니 동맹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성을 다해 너희를 섬기겠으니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사대주의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상대에게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더욱 성숙한 언론의 모습을 기대한다는 말을 쓰려던 것이 조금 더 나가버린 것 같습니다. 이 여학생의 거짓말을 언론이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것은 아마 메르스 때문에 어수선한 사회에서 우리 사회 스스로가 그 소식을 사실로 믿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하루속히 메르스 문제가 안정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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